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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인간 복제를 누려워하는가? - 과학과 윤리에 대하여

[눈비] 눈비닷컴 2019. 8. 26. 03:15

[누가 인간 복제를 누려워하는가? - 과학과 윤리에 대하여]

 

jarmoluk

이 글은 2019년 과학과 윤리에 대해서 생각해 보며 적은 독후감이지만, 내 생각이 더 많이 들어가 있다.

 


“<누가 인간복제를 두려워하는가> 독후감

- 내가 붙인 부제 : 회피나 고집보다는 지혜가 우선이다 -

 

나는 생물이나 화학을 계속 공부하고 싶은 학생이다. 그래서 문학책을 한두 권 읽고 나면 반드시 생명, 화학 쪽의 책을 읽으려고 노력한다. 이번에 고른 책은 미래를 이끌 바이오산업의 한 분야인 복제인간에 대한 이야기다. 그런데 이게 생각보다 내용이 사색적이더라... 윤리와 철학이 들어있는 과학책이므로 문과생에게도 권장해 주고픈 과학책이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의 부제로 회피나 고집보다는 지혜가 우선이다.”를 붙여 보았다.

 

서론에서 결론을 먼저 말하자면, 이 책은 매우 화가 난 아저씨의 책이다. 그런데 아주 예리하고 논리적이며 합리적인 방식으로 화가 나 있다. 이렇게 차갑게 화가 날 수 있다니 "역시 과학자는 다르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래서 인지 이 책은 읽으면서 계속 싸우게 된다. 마치 어른들의 정치 토론 TV 프로그램에서처럼 화가 난 작가 아저씨는 뭔가를 계속 증명하고, 읽는 나는 계속 반론을 펴게 되었다. 아직 이 책을 읽지 않은 사람이 이 책은 어떤 책이냐고 묻는다면 "전투력이 상승하는 책"이라고 정의해 주고 싶다. 어떤 책은 읽으면서 공감만 하고, 어떤 책은 새로운 지식으로 쌓이고, 또 어떤 책은 읽을수록 사람을 생각하게 만드는데, 이 책이 바로 그런 생각의 책인 것 같다. 한 번 읽어보라! 후회하게 될 것이다, 전투쟁이가 되고 말았으니 말이다.

 

'그레고리 E 펜스'<누가 인간 복제를 두려워하는가>는 인간 복제를 찬성하는 주장을 담고 있다. 그러나 그냥 찬성하는 이유를 열거하는 것이 아니라, 왜 반대되는지와 왜 생각해 봐야 하는 지까지 광범위하게 언급하는 책이다. 장담하건데, 인간 복제에 대한 글의 대다수가 복제 양 돌리이야기로 시작을 할 것이다. 이 책도 역시 그렇다. 그것은 너무나 충격적인 일이라서 피해갈 수가 없기 때문이다. 돌리 사건은 1997년 최초로 체세포를 이용한 번식에 성공한 실험이다. 포유류의 번식은 암수의 유성생식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그 동안의 생각을 완전히 뒤엎어버린 사건이다.

하지만 문제가 생겼다. 이 방법은 인간에게도 그대로 적용할 수 있는 기술이기 때문이었다. 놀라운 기술이 증명되는 순간, 전 세계는 일제히 두 편으로 갈라섰다. 마치 성경에서 홍해가 갈라지듯, 냉정하게도 교집합이 전혀 없는 논쟁이 시작되는 순간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 책을 잡는 순간부터 독자는 전투를 시작하게 된다. 작가의 편에 서서 작가와 함께 반대자들을 험담하든지, 작가의 반대편에 서서 속으로 계속 구시렁거리며 글의 빈틈을 노리든지... 하지만 어떤 편이든 이 책은 고마운 책이다. 우리를 매우 깊은 생각의 구렁텅이에 빠트려놓고는 뚜껑을 잠가버린다. 우리가 이리 깊이 들어올 일이 또 얼마나 있으랴...

 

이 책은 1부에서 현재의 복제 기술과 그로 인한 논쟁의 핵심을 설명한다. 여기에서 가장 중요하게 우리가 알아둬야 할 부분은 2. 복제 기술의 현실과 전망부분 중에서 복제는 완벽한 분신을 만드는 것이 아니다라는 단락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인간 복제라는 것을 공상과학 영화를 통해서 분신 복제라고 인식하고 있을 것이니 말이다. 어쩌면 이런 오해는 인간 복제라는 말 때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현실적으로 복제는 신체 복제가 한계이다. 분신 복제는 기억과 성격까지 모두 복사할 경지에 이르렀을 때만 가능하다. 그러므로 인간 복제 논란을 제대로 알려면 선입견을 먼저 깨야 한다. 깨지 못하면 수박 겉핥기로 아는 척을 하는 것에 불과하다. 선무당만큼 무서운 것은 또 없다. 작가는 그런 점을 우려해 한다.

 

그러나, 책을 읽는 우리는 그 보다 더 높은 곳에서 양측의 주장을 관찰해야 한다. 왜냐면 1부에서 어떤 사람은 이미 또 다른 선입견에 빠지기 때문이다. “그래, 분신 복제가 불가능 하다면 반대할 이유가 없지 않는가!”라고 생각하겠지만, 그것은 작가가 의도적으로 가까운 미래까지 만을 토론의 영역으로 잡았기 때문에 생기는 혼란이다. 당연히 가까운 미래에 뇌 속의 기억과 성격까지 스캔을 떠서 복사본을 만든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먼 미래에는 또 모를 일이다. 가까운 미래만을 생각해서 결정을 했는데, 그 먼 미래가 생각보다 더 빨리 내 곁에 와 버렸다면? 현대에 우리가 1년 만에 만들어 내는 정보의 양은 인류가 탄생한 이후 근대시대가 되기 전까지 만든 모든 정보의 양과 맞먹는다고 한다. “빅데이터라는 것을 설명하는 책에서 읽은 내용이다. 그런데 그 속도는 더욱 가속되고 있다. “200년 안에는 문제없어!”라고 자신 있게 생각했는데 그게 50년 만에 이루어졌다면?? 실제로 50년 전인 1970년대에는 TV, 케이블, 개인방송, 동영상 사이트에 있는 수천만 개의 영상 중에 원하는 영상을 걸어다니면서 골라볼 수 있다는 것을 상상도 하지 못했다.

... 여기까지만 생각해 보아도 논쟁의 의미가 충분하지 않는가! 칼과 방패를 단단히 챙겨야 한다.

 

또한 <누가 인간 복제를 두려워하는가>2부에서 인간 복제를 반대하는 주장에 하나하나 반박을 하고, 그래서 반대 주장이 편견이라고 강조한다. 작가는 2부에서 매우 화가 나 있다. 어쩌면 그리도 과학적이지 못한 생각으로 과학을 반대하냐고 호통을 친다.

저자 '그레고리 E 펜스'에 대해 알아보니 대학교수이며 의학, 예술, 인문학 과정에서 철학 부분 강의를 하고 있다고 한다. 그는 20년 동안 생명윤리학을 강의한 학자면서도 복제인간을 찬성한 몇 안 되는 과학자이다. 과학자라고 해서 모두가 인간 복제 연구를 찬성하는 것은 아니다. 그 이유는 이것이 윤리적인 문제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과학자는 겉으로 찬성한다고 말하지 못한다. 그 중에는 정말로 반대하는 과학자도 있겠지만, 속으로는 찬성하는 과학자라도 주변인들의 칼날 같은 눈총 때문에 입 밖에 꺼내지 못했을 것이다. 오호... 이 교수님, 알고 보니 꽤나 용감한 사람이다. 멋지다.

 

이런 유명한 과학자가 말하는 논란에 청소년도 토론에 참가할 수 있는 이유는 이 책이 보편타당한 원칙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원칙을 간단히 정리하자면 객관적이고 논리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작가의 말에 의하면, 대부분의 인간 복제 반대론자들은 윤리와 도덕성의 관점에서 과학을 간섭하려고 한다고 한다. 그래서 작가는 화가 나 있다.

물론 인간 관계에서 윤리와 도덕은 무조건적인 옳음이다. 그러나 이것이 과학과 접한다면 때론 아닐 수도 있겠다. 과학은 가설과 논증을 통해서 결론을 내야 하므로, 윤리와 도덕이 그 동안의 인류 역사와 문명의 손이 뻗치지 못한 지역까지 항상 일치했다고는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의 생명이 중요하지만 마야 문명에서는 인간을 재물로 바쳤었고, 사람의 인권이 중요하지만 중세의 유럽은 마녀사냥으로 화형식을 했었다. 이렇게 본다면 과학에 그 잣대를 그대로 적용하는 것은 비논리적이며 무조건적인 맹신처럼 보일 수도 있다. 과거와 현재의 가치관은 뒤집힐 수 있지만 과학은 그래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작가는 2, 인간 복제에 대한 편견에서 그 이유를 여러 가지 편견과 착각 때문이라고 하고 있다. 1978년 최초로 시험관 인공수정 아기가 태어날 때 전 세계는 과학이 인간을 대량생산하기 시작했다고 걱정했지만, 지금까지 불임 부부들에게 행복을 만들어준 것을 예로 들고 있다. 당시에는 그렇게 비난하던 사람들이 지금은 아무도 인공수정을 비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자신의 체세포로 인간 복제를 하는 것이 무엇이 문제인가를 되묻는다. 맞는 말이다. 시대의 흐름은 그때그때의 가치관이 다르다.

그러나 우리는 한 번 더 생각해 봐야 한다. 왜 불임의 불행을 기술로만 해결하려고 하는 생각에 갇혀야 하는 것일까? 어떤 잡지에서 본 건데, 전 세계 입양아동의 40%가 우리나라 아이들이라고 한다. 부모가 거두지 못한 아이들은 고아원도 넘쳐서 마치 수출되듯이 해외로 보내진다. 작가 그레고리 펜스는 말한다. 과학이 인간을 생산해 낼 것이라는 편견을 버리라고... 여기서 잘 생각해 봐야 할 일이다. 기술이 항상 인간을 불행하게 만들지 않는다는 확실한 증거를 찾지 못한 편견을 버리는 것이 더 쉬울지, 남의 아이라도 함께 행복할 수 있다면 우리의 아이라는 생각으로 입양의 편견을 버리는 것이 더 쉬울지 말이다. 이것을 판단할 수 있는 것도 과학적 논리과정이다. 자료와 근거로 판단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레고리 펜스는 불임부부의 불행을 막을 수 있는 길은 과학 기술 뿐이라고 말하지만, 이것은 또 다른 편견이다. 그 말은 반드시 부부가 낳은 아이만 나의 아이라는 편견 속에서 생긴 주장일 수도 있다. 여기서 편견을 버리라는 그의 주장에는 오류가 생기는데, 인공수정에는 남의 정자나 난자를 빌려 와서 부부 중 한쪽만 관련된 경우도 있고, 체세포 복제의 경우엔 자신의 세포에서 핵을 뽑아 와서 분열시키는 것이므로 결혼 없이 혼자서 아이를 가질 수도 있다. 돈을 주고 아이를 만들어내는 사회가 되면 반려견을 기르고 싶어서 돈을 주고 애견센터에서 분양받아 오는 것과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도 분명 있을 수 있다. 이것이 왜 위험한지 모르겠다면 반려견 집어던진 분양인이란 검색어로 검색해 보면 바로 알 수 있다. 부부의 사랑의 결실이 아니라도 아이를 만들 수 있다면, 사회적 사랑으로 입양을 하는 것보다 얼마나 더 고귀한 일이기에 오로지 기술에만 매달려야 한다는 것인가? 스티븐 잡스도 입양아였다는 것도 유명한 사실이다.

 

2부에서 무식한 편견이라고까지 말하는 펜스 교수님의 글을 보면 토론의 전투력이 폭발하겠지만, 3, 무성생식의 미래에 들어서면 진정제가 들어 있음을 알게 된다. 복제 기술과 배아 연구에 대한 여러 가지 상식적인 지식들이 들어 있다. 여기서 잠간 생명과학 상식을 얘기하자면, 체세포 복제는 난자에 들어 있는 핵을 제거하고 신체의 다른 부분에 있던 세포의 핵을 이식하는 것이다. 정자와 합쳐서 상동염색체의 개수를 완성하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이미 완성된 2n의 염색체가 이식된 상태에서 세포분열을 하기 때문에 원래 개체의 DNA 특성을 모두 가지게 된다.

앞서서 모든 것을 기술로만 보는 것에는 비판적인 시각을 가졌었지만, 줄기세포를 이용해서 장기생성을 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적극적인 찬성을 하게 된다. 예를 들어 선천적으로 간이 약한 유전병이 있다고 할 때, 건강한 간을 배양해서 이식할 수 있다면 절망에게 주는 희망의 선물인 셈이다. 이런 것을 이해하게 될 즈음엔, 진정제가 아니라 영양제가 들어 있음도 느끼게 될 것이다.

 

배아줄기세포를 이용하는 경우엔 임신 후 8세포기 때 배아를 떼어내서 배양하는 방법도 있다. 이 역시 손상된 조직이나 기능을 회복시킬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에는 배아를 인간으로 볼 것인가 하는 논란이 존재한다. 작가는 인간의 배아는 생명이 아니므로 살인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이를 살인이라고 규정하는 종교단체, 도덕 단체의 방해는 비과학적인 고집일 뿐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 부분은 타협의 길이 쉽지 않아 보인다. 최근에 우리나라에서 낙태법을 개정하려는 움직임이 있다는 기사를 읽었다. 임신 22주를 기준으로 그 전의 태아는 어차피 어머니의 보호가 없다면 혼자 생존할 수 없기 때문에 인간으로 볼 수 없다는 해석이 인상적이었다. 그런데 가슴이 아프다. 물론 임신 5~6개월의 태아가 기억도 사고도 할 수 없는 존재지만, 그렇다고 사지를 갈갈이 찢어서 낙태시킬 때 아픔도 두려움도 느끼지 않는다고는 볼 수 없다. 그러나 사회적으로 볼 때, 성범죄에 의한 여성의 고통을 생각한다면 무작정 막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이 선입견에 의한 신기술의 회피도 옳은 것이 아니며, 사회적 이해를 더 신중하게 생각하지 못하는 기술 개발의 고집도 옳은 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부제를 지혜가 우선이라고 정하고 싶었던 것도, 보는 방향에 따라 문제점과 해결점이 동시에 존재할 때 가장 합리적인 선에서 타협점을 찾는 방법은 지혜를 우선에 둘 때라고 생각한 이유이다.

 

예를 하나 들어 본다. <누가 인간 복제를 두려워하는가> 본문에 나오는 부분이다. 최초의 복제양 돌리를 탄생시킨 윌머트 박사는 244번의 시도를 했고, 그 중에서 이식에 성공한 것은 34번 밖에 안 되었으며 실제로 배양에 성공한 것은 단 15개의 난자였다고 한다. 그리고 5마리가 탄생했지만... 그 중 2마리는 10일도 못 견디고 죽고 말았다. 만약 이런 과정에서 돌연변이가 생긴다면? 누군가는 실험이 실패했다고 보고서 한 장만 달랑 쓰고는 안쓰러운 눈으로 살려달라고 바라보는 돌연변이를 죽여버릴 지도 모른다.

어떤 종교인은 인간이 신의 영역인 생명을 창조하는 것이 옳지 못한다고 했고, 그레고리 펜스 박사가 그 주장을 과학적이지 못하다고 비판하는 것까지는 이해하겠지만, 정작 내가 불안한 것은 인간의 불완전성이다. 불완전한 인간이 실험을 통해서 생명을 다루는데 어떠한 실패도 어떠한 돌발적인 변수도 발생하지 않는다는 과학적 데이터는 어디에 있단 말인가?

 

어떤 인간 복제 찬성론자는 기억까지 복제가 가능한 시대가 오면 불로장생하는 꿈을 이룰 수 있다고 말하지만, 그렇더라도 죽음을 맞는 본체는 죽음의 두려움을 느껴야 하고 복사된 개체는 경험이 아니라 기억으로 과거를 알 뿐이다. 이것마저 해결하려면 뇌를 이식해야 하는데, 뇌의 노화는 또 어떻게 복제해야 하는지 생각할수록 머리가 아파 온다.

그래서 가장 합리적인 인간 복제의 기술 수준은 줄기세포를 이용해서 장기를 성장시키는 실험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반드시 장기를 교체하는 것만이 줄기세포 기술이 아니다. 예를 들어, 선천성 면역결핍증에 걸린 어린 아이에게 해당 효소를 유도하는 유전자를 복제 배양하여 주입하고 좋은 결과가 있었다는 사례가 이 책에 나와 있다. 영생을 누리게 할 수는 없더라도 일반인의 평균연령 정도만 행복하게 살 수 있다면 최상의 결과가 아닐까 생각한다.

 

4, 도덕과 생식 윤리에 들어서면 우리 투덜이 펜스 교수님께서 나름의 기준을 마련해 주신다. 인간 복제 규제와 실질적인 향상이 무엇인가의 방향을 읽을 수 있다. 그런데 한 가지 의문스러운 것은 그가 말한 종의 향상을 위한 노력은 당위의 문제다라는 말이다. 인간 복제가 현실화되면, 사람들은 보다 튼튼하고 보다 똑똑한 자손을 얻으려고 할 것이므로 전체 인간의 질이 향상된다는 얘기이다. 얼핏 들으면 당연한 얘기다. 그런데 나는 계속 궁금하다. 반대로 본다면 그것은 획일화가 아닌가? 우리 인간의 눈에는 뛰어난 자손을 퍼트리는 노력으로 보이겠지만, 무궁무진한 우주의 변화에서 본다면 획일화는 멸종의 위험성을 높이는 길이라고 들었다. 지구 역사에는 전체 생명의 80% 이상이 멸종한 페름기가 있었다. 또한 중생대 백악기까지는 공룡이 가장 강력하고 훌륭한 생명체였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대멸종의 시기에서 살아남아 번성한 것은 설치류였다. 과연 인간이 최상이라고 여기는 것이 우주가 보기에도 최상일까? 이것은 앞서 얘기한 연대와 지역에 상관없이 완벽히 일치되는 윤리는 없었다와 같은 얘기다. 그러므로 인간 복제 과학 기술 이외의 다른 과학들도 함께 고뇌해야 되는 문제인 것이다.

 

마지막으로 하나 더 의문을 두게 되는 것은 빈부의 격차이다. 현재도 체외수정은 엄청난 비용이 들어간다. 최상의 후손을 두기 위한 인간 복제 기술이 현실화된다는 것은 그 비용을 견딜 수 있는 계층에게 우선권이 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보편적인 인류 행복을 위한 기술인가? 미래의 멸종을 대비한 노력일 수는 있지만 인류의 행복을 위하여!”라는 거창한 카드를 높이 들 수 있는 가치는 아니라고 본다. 좀 충격적인 것은, 현재도 최상 계층은 자신들만의 좋은 환경을 위해 돈을 펑펑 쓰는데 그것이 죄는 아니라는 펜스 박사의 반박이었다. 그렇다 물론 그것을 죄악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것이 인류의 최선이라고도 말할 수도 없다. 기왕 망친 길이니 상관없이 가겠다는 말은 너무나 무책임하게 들린다.

사실, 일반인이 인간 복제를 두려워하는 것은 권력과 상업성의 문제점 때문이 더 크다는 것을 누구나 알고 있다. 고대보다 현대에 더 뚜렷해지는 증상이다. 그것을 종교적이거나 공상과학 영화의 편견 때문이라고 호통을 치는 것은 옳지 않다. 그것이 두려워서 신기술을 포기할 것인가에 대한 정성된 주장은 그대로 인정하지만, 그 주장을 증명하는 논거로 삼는 것들은 길을 잘못 가도 한참을 잘 못 갔다는 생각이 든다.

 

<누가 인간 복제를 두려워하는가>는 오랜만에 많은 생각을 하게 해 주는 책이었다. 모든 책이 반드시 옳은 책일 필요는 없다. 나쁜 책이 아니라면 나와 생각이 다르더라도 나의 생각을 키워주는 영양분인 것이다. 덕분에 생명과 기술, 그리고 지혜가 무엇인가하는 생각을 해 볼 수 있었다.

참고로, 인간 복제에 대한 오해가 있을까봐 한 번 더 되짚는다. DNA를 그대로 복제하더라도 생각과 재능, 지능지수까지 완벽히 같은 사람은 태어나지 않는다. 사람이란 DNA라는 면발 위에 예쁘게 고명을 얹은 잔치국수와 같다. DNA가 훌륭하다면 쫀쫀하고 깔끔한 국수맛을 느낄 수 있겠지만, 실제로 우리가 느끼는 혀 끝의 맛은 그 위에 얹어진 고명과 국물에 스며들은 양념의 맛이다. 같은 쌍둥이라도 자라난 환경과 본인의 노력에 따라 전혀 다른 성격과 능력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경험적으로 누구나 알 수 있다.

아주아주 길고 먼 길을 왔다. 이 즈음에서 한 가지 결론은 날 것 같다. 과학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단순한 호기심 해결을 위해서라도 훌륭한 학문이고, 인류의 발전을 이룩한다는 점에서도 훌륭한 학문이지만, 인간을 위해서라는 수식어가 붙으면 더욱 훌륭한 학문이 될 것이라는 점이다. 인간 복제에도 여러 방향이 있다. 그 중에서 보편적인 행복에 기여하는 것을 우선으로 하고 나머지는 합리적 합의가 되는 선에서 노력하면 되지 않을까...? 비판을 받으며 증명하고 발전하는 것이 실증적인 과학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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